- 칼빈의 기독교 강요 -

<기독교강요> 초판이 1536년 세상에 나왔을 때, 기독교계를 뒤흔들고 역사를 움직였다. 당시의 로마교회는 <기독교강요>를 두려워했다. 또한 개혁교회는 이 책으로 말미암아 체계가 잡히고, 당당하게 참 교회를 향한 길을 갈 수 있었다. 이 책으로 죤 칼빈은 일류 신학자로 인정받았다. 1559년의 <기독교강요> 최종판에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가 이 책의 초판을 내놓았을 때, 주님께서 무한한 은혜로 그와같은 성공을 거두게하실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따라서 나는, 내가 더 분발하도록 격려해주신 여러분들의 열렬한 평가에 대하여 최선을 다하여 미력이나마 보답하도록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가장 큰 배은망덕이라고 생각한다..."('독자에게 드리는 글' 중에서).
종교개혁에 있어서 <기독교강요>는 포괄적이고 체계적인 가장 영향력있는 교의신학의 지침서가 되었다.


1. 기독교강요의 중요 판들과 저술 배경
<기독교강요>는 1536년의 초판 이후, 계속 조금씩 증보되었다. 중요한 판은 1536, 1539, 1543, 1559년도 판들이다.

(1) 1536년 초판
초판의 사상이 거의 변함없이 최종판에도 이어진다는 점에서 이 초판은 칼빈 신학의 정수요 핵심이라고 불리운다. 초판은 학계에서 역사적 가치에 있어 최종판 이상으로 많이 읽혀지고 있다. <기독교강요> 초판은 교리문답서인가 혹은 변증서인가? 칼빈은 교리문답서를 만들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그는 프란시스 1세에게 보내는 서한의 첫머리에서 자신의 저술 의도를 밝히고 있다 :

"...오로지 본인의 목적은 종교적인 열정을 지닌 사람들이 참된 경건에 이르도록 하기 위한 확실한 기본원리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간단하고 초보적인 교리의 형태로..."

칼빈은 박해받는 프랑스의 개신교도들을 위하여 외국의 공감을 불러 일으키려고 당시 공용어인 라틴어로 쓰기는 했으나, 불어판을 곧 속간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간단한 교리문답서를 만들려는 계획은 뜻대로 될 수 없었다. 당시에 칼빈과 그의 동포들은 프랑스의 정치 질서를 파괴하고자 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프란시스 1세는 당시 프랑스에서 발흥하고 있던 모든 혁신적인 경향이 국가와 교회를 위협하는 이단적인 것이라고 단정하는 소르본느 대학측의 견해에 동의했다. 그는 이단을 숙청함으로써 프랑스의 복음주의자들과 외국의 복음주의자들을 격리시키고자 했다. 이런 방안의 지지자들은 프랑스의 모든 복음주의자들을 재세례파로 몰아부치거나, 무식한 오합지졸로 보았다. 또한 그들의 운동을 국가의 내적 질서에 대항하는 무정부적 행동과 반란으로 정죄했다. 프랑스 개신교도들은 독일 개신교도들과는 달리 재세례파와 똑같아서 선동적인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칼빈은 진정한 복음주의자들을 변호하기 위해 <기독교강요>를 펴냈다. 그는 신앙의 형제들을 위한 교리문답서의 필요성을 느꼈다. 동시에 박해의 중단을 위해 왕에게 탄원하고 진실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동기가 <기독교강요>의 집필을 가능케 했던 것이다.

<기독교강요> 초판은 모두 6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 율법(십계명 해설 포함)
2. 믿음(사도신경 해설 포함)
3. 기도(주기도문 해설 포함)
4. 성례
5. 거짓 성례